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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기자칼럼] 극한 선언, 나는

등록일: 
2019.03.22
조회수: 
185

혼자의 힘만으로 단단한 주류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던지는 질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겪는 고충을 그린 영화다. 다니엘은 질병수당 심사에서 탈락한 후 이를 따지기 위해 담당기관으로 전화를 걸어 보지만, 늘 그렇듯 ‘모든 상담원은 통화 중’이다. 1시간48분이나 기다려 가까스로 통화에 성공한 다니엘이 “요금은 어쩔 거요?”라며 호통을 치지만 돌아오는 답은 담당자에게 문의하라는 것.
이제 그는 심사 결과에 항고하거나, 아니면 실업수당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인터넷으로만 가능한 모든 절차가 마우스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에게는 ‘구직’보다 어렵다. 그의 사정은 ‘원칙’ 앞에 무력하다.

다니엘은 결국 수치심만을 강요하는 정부의 지원을 포기하고, 저항의 표시로 고용센터 담벼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전화의 망할 대기음도 바꿔라”라는 글을 남긴다. 마침내 항고가 받아들여지지만, 재판 당일 그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는 영국의 허울뿐인 복지를 풍자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우리 현실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수많은 ‘다니엘’이 있다. 지난달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는 치매를 앓던 80대 노모와 50대 딸이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이 받는 정부 지원금은 노인기초연금 25만원이 전부였다. 모녀는 서울시가 2015년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자 시작한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사업 대상에도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했다고 한다. 가난과 무능함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선별적 복지보다는 보편적 복지 서비스를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가 조건 없는 기본소득 형태의 청년수당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현금 복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서울연구원과 민간연구소 랩 2050이 서울시에 건넨 제안으로 일종의 ‘정책실험’인데도 ‘예산 낭비’니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시가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청년수당이나 경기도에서 아동수당을 지급한다고 했을 때와 비슷하다. 기초연금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반대하는 서울 중구 ‘공로수당’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건 우리는 ‘현금 복지’에 대해 무척 엄격하다는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논쟁이 이렇게 활발했던 적이 있던가를 돌아보면 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2005년 도입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이명박 정부에서 사실상 무력화됐지만,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자는 주장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적은 없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유명무실해진 종부세 등에는 이토록 관대하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복지 대상을 낙오자로 간편하게 분류하는 방식은 왜 의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다니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은 제도의 허점을 따져 물을 때가 아닌 벽에 정부를 비방하는 낙서를 하고, 법정에서 쓰러졌을 때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씨 죽음 이후에야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전면 개정됐다.

미국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규”(<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들을 매일 어기라고 한다. 그는 독일에서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데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가가 일상을 통제하는 관행을 읽는다. 법을 어기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고, 규칙의 맹목성을 경고한 것이다.

‘나, 다니엘 브레이크’라고 선언할 때, 합당하지 않은 법에 부단히 시비를 걸 때 세상에는 균열이 생긴다. 살면서 한 번은 반항해 보자.